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의대 부속병원 학살 사건 (문단 편집) == '''전쟁범죄''' == 1949년 8월 12일 제네바 회의에서 채택된 1949년 [[제네바 협약]]에서는 '전지(戰地)에 있는 군대의 부상자 및 병자의 상태 개선에 관한 조약' 제12조에 "군대의 구성원과 기타의 자로서 부상자 또는 병자인 자는 모든 경우에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. 그들은 성별, 인종, 국적, 종교, 정견(政見) 또는 기타의 유사한 기준에 근거를 둔 차별없이 인도적으로 대우 또는 간호되어야 한다. 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그들의 신체에 대한 폭행은 엄중히 금지한다. 특히 그들은 살해되고 몰살되거나 [[고문]] 또는 생물학적 실험을 받아서는 안된다."고 규정하고 있다. 만일 이게 정상적인 전쟁이었다면, 북한군은 포로로 잡은 부상병들을 보호하고 치료가 계속 진행되도록 보장했어야 했다. 하지만 애초에 [[적화통일]]을 성공하면 어차피 체제에 위협이 될 반공주의자들을 죽여버릴 작정이었던 북한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. [[스톡홀름 증후군|포로들을 꼬드겨서 자기편으로 전향시키는 것]]을 시도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차버린 셈이다.[* 하지만 설령 그랬다고 해도 북한에서 [[적대계층]], 운이 좋아야 겨우 [[동요계층]]이 될 수 있으니 이 역시 부정적인 결과로 예상할 수 있다.] 저항 불능의 환자들을 유린한 정황만으로도 잔혹하지만, 북한군은 이에 대해서 전혀 반성하지 않고 현재도 군인들에게 [[제네바 협약]] 같은 것은 일제강점기의 [[일본군]]인 양 '군인을 겁쟁이로 만든다!'며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다. 또한 북한군은 이 사건 이후로도 붙잡은 포로를 학살하거나 자기네 병사로 강제로 편입시키는 짓을 일상적으로 저질렀다. 끝까지 그토록 그리워 하던 집과 가족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우리 미귀환 [[국군포로]]가 수만 명에 달하는 것도 북한이 이른바 [[해방전사]]라고 하여 자기들 멋대로 북한군에 편입시켜 놓고 휴전 때까지도 이들은 이제 포로가 아니라고 주장한 탓이 크다. 이후에 이들이 어떻게 되었을 지는 [[적대계층]] 문서를 참고. 이런 식의 잔혹행위를 북한군이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었던 데는 의정부 축선을 통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 주력이 [[소련군]] 출신이 주축이 된 3사단, 4사단, [[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|9전차여단]]이었던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. 김일성은 의도적으로 서울 점령이라는 공을 몰아주기 위하여 이들을 서울 공격의 주공으로 삼았다. 3사단의 경우 병사는 북한에서 징집한 신병들이었으나 장교는 대부분 2차대전 중 소련군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는 자들이었으며 4사단은 1개 연대가 [[중국 인민지원군|중공군]] 출신 연대(18연대), 나머지 병사들은 [[조선로동당]]원 이었고 군관은 소련군 출신자가 많았다. 9전차여단의 경우 소련에서 전차병 교육을 받고 돌아온 이들이 핵심이었고, 소련과의 연대를 원하던 김일성이 이들을 무슨 소련 [[근위대]] 정도로 공을 세우게 해 선전용으로 사용할 작정이었으므로, 더더욱 잔혹행위가 '''윗선에서부터 권장되었다.'''[* 그리고 결국 서울이 함락되자 이 3사단, 4사단, 9여단은 각각 '근위 서울' 칭호를 받고, 9여단은 [[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 땅크사단|사단으로 승격된다.]] ] 애초에 공산군측 전체가 미쳐 돌아가는 형세였는데, [[중국 인민지원군|중공군]]은 [[삼대기율 팔항주의]]라는 구호가 있었으나 이는 군법으로 시행된 [[국공내전]] 때부터 사실 잘 지켜지지 않았고, 국민당군을 상대로 학살이나 마을 주민 하나를 통째로 총칼로 협박해 [[총알받이]]로 국민당군이 형성해둔 화망에 걸어가게 한 뒤 이를 왜곡하여 선전에 써먹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. 중공군은 포로를 상대로 [[심리전]]을 벌여서, 이미 중국 심리학자들의 조언대로 사상전향서와 인간 내면의 인지부조화를 이용해 포로를 상대로 사상전향서를 안 쓰면 밥을 안 주고 구타하는 식으로 학대하곤 했다. 민가에서 사용하는 소를 강제로 잡아서 먹고 쓸 수도 없는 군표를 대충 만들어서 땡치는 일이 많아 민심이 크게 악화되곤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